6년 못 뗀 한글 6개월 만에 정복
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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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09:26
6년 못 뗀 한글 6개월 만에 정복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월평빌라' 이야기-33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7-10-18 11:47:22
지선(가명)이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6년 동안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가 한글을 모르고 말이 어눌했기 때문에 한글 공부에 공들였습니다. 특수학급 교사와 장애인복지관 언어치료사가 6년 가르쳤고, 시설 직원도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쓰고 몇 문장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시설 바깥에서 혼자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자취하면서 핸드폰이 필요했고, 받기만 해도 좋다는 심정으로 장만했습니다.
처음에는 걸려온 전화를 받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선이가 먼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고, 문자로 대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선 병원, 지선 학교, 지선 집… 단어 몇 개를 조합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고작이라 했지만, ‘병원, 학교, 마트’ 같은 단어는 스스로 익힌 겁니다. 차츰 새로운 단어가 늘고 문장을 갖추고 문장이 길어졌습니다.
지선이가 한글을 익히는 방법은 매우 놀랍습니다. 놀랍다고 했지만, 매우 평범한 방법입니다.
어느 날, 장 보려고 마트에서 지선이와 시설 직원이 만났습니다. 지선이는 무엇을 살지 종이에 적어왔습니다. 직원이 부탁한 게 아니었습니다. 지선이가 필요해서 적어온 겁니다.
애닭이 왕란, 유우, 바나나, 토마토, 행복한 콩, 당군, 고구마, 지짐만두. 맞춤법이 틀렸고 글씨가 삐뚤었습니다. 절실한 만큼 어떻게든 옮겨 적었을 겁니다. 지선이는 그 후로 장 볼 때마다 메모했고, 새로운 단어가 늘었습니다.
지선이는 마트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는 장 보면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또 어느 날은, 학교 소풍 가는 날짜에 동그라미 표시한 달력 사진과 ‘지선이아림고등학교월화수목심’이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진으로 소풍 날짜를 알리는 거겠죠?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니 알아보고 챙겼습니다.
‘지선이아림고등학교월화수목심’은 무슨 뜻일까요? 풀이하자면, ‘지선이가 아림고등학교에서 월 화 수 목 시험을 본다.’입니다. ‘지선이, 아림고등학교’는 아는 단어입니다. ‘월화수목’은 새로운 단어인데 달력을 보고 적은 것 같습니다. ‘심’은 ‘시험’이라는 낯선 단어를 아는 데까지 적은 것 같습니다.
시설 바깥에서 자취하니 시설 직원과 자주 연락하며 상황을 알려야했고, 전화 통화도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문자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글을 익혔습니다.
단어가 늘고 문장을 갖추면서, 문자 보내는 요령이 늘면서, 문자 보내는 대상이 늘었습니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도 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쓸 줄 모르면 적어 달라 했고, 건네받은 메모를 보고 따라 적어 보냈습니다. 따라 적으며 보내다가 익힌 단어나 문장은 더 이상 적어 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익혔습니다. 물론 한두 번에 익히는 건 아니겠죠.
지선이는 핸드폰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가 자취하면서,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말과 글이 늘었다는 건 학교 선생님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업을 통합반에서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6년 동안 배워도 익히지 못했던 한글을 6개월 만에 정복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느 시설에서, 체험홈에 사는 입주자에게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장 보는 걸 가르쳤답니다. 성실히 가르쳤고, 잘 배우고 잘 했습니다. 어느 날, 체험홈에 사는 한 아가씨가 같은 시설의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아가씨가 원장님을 찾아와서 그러더랍니다.
“원장님, 저 결혼해요. 결혼하면 남편에게 밥해줘야 하니까 밥하는 거 가르쳐주세요.”
그럼, 지금까지 체험홈에서 가르치고 배운 밥하는 기술은 무엇인가요? ‘체험홈’에서 ‘밥 짓기 프로그램’으로 배운 건 ‘가상’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을 따라간 운전자라고나 할까요. 당사자에게는 ‘실제’가 아니었던 거죠. 남편에게 밥해주는 건 실제고요.
지선이가 6년 동안 했던 한글 공부를 ‘프로그램’이나 ‘가상’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지선이가 6개월 동안 자취하고 핸드폰 사용하며 익혔던 한글 공부가 ‘실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지선이를 지원한 월평빌라 이수진 선생님과 박현진 선생님의 말과 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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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시설 바깥에서 혼자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자취하면서 핸드폰이 필요했고, 받기만 해도 좋다는 심정으로 장만했습니다.
처음에는 걸려온 전화를 받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선이가 먼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고, 문자로 대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선 병원, 지선 학교, 지선 집… 단어 몇 개를 조합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고작이라 했지만, ‘병원, 학교, 마트’ 같은 단어는 스스로 익힌 겁니다. 차츰 새로운 단어가 늘고 문장을 갖추고 문장이 길어졌습니다.
지선이가 한글을 익히는 방법은 매우 놀랍습니다. 놀랍다고 했지만, 매우 평범한 방법입니다.
어느 날, 장 보려고 마트에서 지선이와 시설 직원이 만났습니다. 지선이는 무엇을 살지 종이에 적어왔습니다. 직원이 부탁한 게 아니었습니다. 지선이가 필요해서 적어온 겁니다.
애닭이 왕란, 유우, 바나나, 토마토, 행복한 콩, 당군, 고구마, 지짐만두. 맞춤법이 틀렸고 글씨가 삐뚤었습니다. 절실한 만큼 어떻게든 옮겨 적었을 겁니다. 지선이는 그 후로 장 볼 때마다 메모했고, 새로운 단어가 늘었습니다.
지선이는 마트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는 장 보면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또 어느 날은, 학교 소풍 가는 날짜에 동그라미 표시한 달력 사진과 ‘지선이아림고등학교월화수목심’이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진으로 소풍 날짜를 알리는 거겠죠?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니 알아보고 챙겼습니다.
‘지선이아림고등학교월화수목심’은 무슨 뜻일까요? 풀이하자면, ‘지선이가 아림고등학교에서 월 화 수 목 시험을 본다.’입니다. ‘지선이, 아림고등학교’는 아는 단어입니다. ‘월화수목’은 새로운 단어인데 달력을 보고 적은 것 같습니다. ‘심’은 ‘시험’이라는 낯선 단어를 아는 데까지 적은 것 같습니다.
시설 바깥에서 자취하니 시설 직원과 자주 연락하며 상황을 알려야했고, 전화 통화도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문자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글을 익혔습니다.
단어가 늘고 문장을 갖추면서, 문자 보내는 요령이 늘면서, 문자 보내는 대상이 늘었습니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도 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쓸 줄 모르면 적어 달라 했고, 건네받은 메모를 보고 따라 적어 보냈습니다. 따라 적으며 보내다가 익힌 단어나 문장은 더 이상 적어 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익혔습니다. 물론 한두 번에 익히는 건 아니겠죠.
지선이는 핸드폰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한글을 배웠습니다.
지선이가 자취하면서,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말과 글이 늘었다는 건 학교 선생님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업을 통합반에서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6년 동안 배워도 익히지 못했던 한글을 6개월 만에 정복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느 시설에서, 체험홈에 사는 입주자에게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장 보는 걸 가르쳤답니다. 성실히 가르쳤고, 잘 배우고 잘 했습니다. 어느 날, 체험홈에 사는 한 아가씨가 같은 시설의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아가씨가 원장님을 찾아와서 그러더랍니다.
“원장님, 저 결혼해요. 결혼하면 남편에게 밥해줘야 하니까 밥하는 거 가르쳐주세요.”
그럼, 지금까지 체험홈에서 가르치고 배운 밥하는 기술은 무엇인가요? ‘체험홈’에서 ‘밥 짓기 프로그램’으로 배운 건 ‘가상’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을 따라간 운전자라고나 할까요. 당사자에게는 ‘실제’가 아니었던 거죠. 남편에게 밥해주는 건 실제고요.
지선이가 6년 동안 했던 한글 공부를 ‘프로그램’이나 ‘가상’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지선이가 6개월 동안 자취하고 핸드폰 사용하며 익혔던 한글 공부가 ‘실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지선이를 지원한 월평빌라 이수진 선생님과 박현진 선생님의 말과 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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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박시현 (refree@welfare.or.kr)